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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피보다 진하다

by BumPD 2010.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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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피보다 진하다

- 이 이야기의 주인공 신호범은 거리 소년으로,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떠돌다 열여덟 살에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고학으로 대학교수가 되었고, 워싱턴 주 하원의원을 거쳐 아시안계 최초 주 상원의원과 부의장이 된 그가 이제 희망을 이야기 하려 한다.

 나는 입양아다. 6.25 전쟁 이후 미군들이 남기고 간 혼혈아들을 펄 벅 여사가 재단을 만들어 미국으로 입양하기 시작해 지난 50년 동안 미국과 유럽, 호주로 한국 어린이가 입양되어 갔다.

 나는 16세가 되던 6.25 다음 해에 미군 군의관이었던 지금의 양아버지에게 입양되었으니 나야말로 제일 나이 많은 입양이다.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와 정들 새 없었던 아버지 뿐이었던 내게 양아버지의 출현으로 새로운 삷이 펼쳐졌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양어머니와 동생들과의 만남은 또 다른 갈등과 고난의 시작이었다.

 가정과 가족이 주는 유대감과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온 나는 가정을 이룬 후 그 무엇보다 아기를 기다렸다. 아내가 아기를 가졌을 때 자나깨나 생각했던 것이 '어떻게 하면 잘 기를 수 있을까? 고생과 슬픔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을 보낸 내가 과연 자식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첫아기가 유산되고, 이후 4년을 하루같이 아기를 기다리던 우리 부부는 점점 지쳐갔다. 아기를 키우고 싶어 병이 날 지경이던 아내가 먼저 제안했다. "폴, 우리 아기를 입양하면 어떨까요?"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자신의 핏줄에 집착하는 한국 남자여서가 아니었다. 입양했다가 만에 하나 아기를 낳게 되면 행여라도 차별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가 그때 만일 입양되지 못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서 였다.

 우리는 혼혈아를 서너 명 입양하기로 했다. 여름방학을 맞아 새로 이사한 집에 페인트칠을 하고 있는데 입양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페인트통과 붓을 그대로 던져 놓고 부랴부랴 아기가 있다는 대기 가정으로 찾아갔다. 귀여운 사내아이였다. 살며시 들어 품에 안자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커진 두 눈이 반짝였다. 왠지 운명적으로 나의 아들인 것만 같아 가슴이 찡했다. 보물이라도 얻은 듯 떨리고 벅찬 가슴으로 아기를 꼬옥 안고 새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아내는 24시간 아이에게 꼭 붙어 떨어질 줄 몰랐고, 나도 집에 오고 싶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람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기만 했던 집안이 아기의 울음소리로, 생기로 가득 찾다. 게다가 3개월 후에는 딸을 입양했다. 정말이지 집안이 가득찬 느낌이었다. 비록 피를 나눈 아이들은 아니었지만, 이것이 바로 '가족' 이라는 거구나 하는 기쁨에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 후 나는 한국을 다녀올 때마다 홀트에서 미국으로 보내는 입양아들을 데려오는 보모 노릇을 자청했다. 언젠가 곰인형을 품에 안은 세 살짜리 사내아리를 맡은 적이 있었는데 내가 할아버지처럼 푸근해 보였는지 금방 안겼다. 여행 중에도 전혀 울지도 보채지도 않았다. 내가 먹으면 자기도 먹고, 책을 보면 자기도 책 보는 시늉을 하고 내가 자면 자기도 자는 척했다. 그러나 방긋방긋 웃으며 재롱을 부리던 아이가 공항에 마중 나온 미국인 양부모를 보자 그들의 낯선 모습에 질겁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내게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키우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이에게는 이미 갈 길이 따로 있었다. 나는 허전하고 쓰린 가슴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한동안 한국에서는 고아들을 외국으로 내보내는 것은 국가의 위신 문제라며 고아 문제를 국내에서 해결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자기 핏줄에 집착하는 한국의 보수성 때문에 더 문제가 되어 결국 다시 외국으로 보내고 있다고 한다. 가끔 교도소에 강연을 갔다가 한국 입양아들을 만나면 속이 상해 맥이 풀려 버리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열에 아홉은 입양 온 것이 그들에게 잘 된 일이니 어쩌겠는가.

 한인회 회장이 된 나는 먼저 칙목단체인 한인회를 봉사단체로 바꾸고 이제껏 우리끼리 어울리는데 그쳤던 각종 행사들을 새롭게 기획해 나갔다. 유학생들과 이제 막 이민 온 사람들의 서류 작업, 통역, 아이들의 입학문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돕기 등의 봉사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이민1세를 위한 영어교식과 2세와 입양아를 위한 한글교실을 열었다. 몸은 비록 만리 타국에 있지만 마음만은 조국과 함께 하고자 한인의 날을 정하고, 각계 인사들과 한국 아이들을 입양한 부모들, 한국 참전 군인들을 초청해 명절 행사와 광복절 행사를 벌였다.

 얼마 전 한국 경제의 악화로 재정난을 격고 있는 홀트에 이곳에서 모금한 돈을 갖다 준 적이 있다. 그러자 그곳에서 헌신하는 자원봉사자들과 전 직원이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그들도 이 말을 알고 있는 것일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 그러나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

-[공부도둑놈, 희망의 선생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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